우리는 굿이나 고사 등을 지낼 때 상 위에 돼지머리를 놓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면 돼지는 언제부터 제물로 쓰였을까?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에 희생으로 쓰여진 동물이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희생으로 교시(郊豕)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유리왕이 19년 8월에 교시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라는 자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더니 장옥택(長屋澤)중에 이르러서 돼지를 찾아 각근(脚筋)을 끊었는데,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제천(祭天)할 희생을 어찌 상할 것이냐’하고 두 사람을 갱중(坑中)에 넣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제천의 희생으로 돼지를 길렀으며 이 돼지는 매우 신성시 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史記> 卷 第三十二 雜志第一祭祀조에 보면 <고기, 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항상 삼월 삼일에 낙랑의 구릉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다고 하였다.
<東國歲時記> 十二月 臘조에 보면 산돼지가 납향(臘享)에 제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지후 제3미일(未日)로 납일(臘日)로 정하여 종묘와 사직에 큰 제사를 지냈다. 납향에 쓰는 고기로는 산돼지와 산토끼를 사용했다. 경기도내 산간의 군(郡)에서는 예로부터 납향에 쓰는 산돼지를 바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 수령은 온 국민을 발동하여 산돼지를 수색하여 잡았다. 이러한 관습은 폐단이 있어 정조 때부터는 서울의 포수들을 시켜 산돼지를 사냥해 오도록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무당의 큰 굿에서나 동제(洞祭)에는 돼지를 희생으로 쓰고 있다. 또한 각종 고사때는 어김없이 돼지머리가 등장한다. 그래서 시월 상달 고사철에 푸주간에 ‘고사용 돼지머리 있음’이라고 써 붙일 정도이다. 집에서 지내는 고사나 개업 같은 행사 때면 우린 의례 돼지머리를 가장 중요한 “제물”로 모신다.
이처럼 제전에 돼지를 쓰는 풍속은 멀리 고구려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는 역사가 깊은 민족이다.
돼지는 그 체질이 아주 강건하다. 어떤 기후나 어떤 풍토에도 잘 적응하여 살 수 있으며, 잡식동물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장하는 속도가 조숙하므로 대단한 다산계(多産系) 동물에 속한다. 돼지는 이미 기원전 5천년경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앙소기(仰韶期) 유적에서 돼지의 뼈가 다수 출토되며 적봉홍산후(赤峰洪山後)의 주거 유적에서도 역시 많은 돼지의 뼈가 발견되고 있다.
은대(殷代)에는 이미 오희(五犧)의 하나로 제사에 바쳐지고 있었다. 이 돼지가 한(韓)대에 오면 옥돈(玉豚)이라 불리는 장송용(葬送用)의 옥기(玉器)로 변한다. 옥이나 흰 대리석 등으로 돼지 모양을 만들어 죽은 사람의 좌우 주먹에 쥐어주는 의례는 내세(來世)의 식료(食料)로서 간직하라는 뜻이다. 아울러 한대(漢代)의 명기(明器) 중에서는 돼지와 돼지우리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있어서 돼지는 자연의 풍요와 비옥함의 상징으로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었다. 로마인들에게 돼지나 멧돼지는 특별한 의미를 띤다. 즉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이 위험할 때에만 공격하기 때문에 용기와 자신감, 대담무쌍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제물에 쓰인 돼지의 피를 살인범의 죄를 정화하는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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