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는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로서 봉건적 병폐로 말미암아 도처에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던 때였다. 대외적으로는 과학과 서교의 물결로 새로운 시대라는 과제와 더불어 이에 대한 첨예한 갈등의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심화된 사색당파의 대립으로 급기야 1801년 순조 원년인 신유년에 있었던 가톨릭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정쟁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다산은 이런 상황을 경세유표 서문에서 “털끝하나 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개혁하지 않으면 조선은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다산의 이런 생각은 민생현장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후의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이로 인한 관리들의 온갖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개선을 고민하면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있은 다음부터는 온갖 제도가 해이해지고 모든 사업이 뒤죽박죽이 되었으나 병영은 계속 증가되고 재정은 고갈되며 토지제도는 문란해지고 세금 징수는 공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생산 원천은 극력 막아 버리고 낭비의 구멍은 마음대로 뚫어 놓았다. 여기서 다만 부서 개편과 인원 축소로써 구급책을 삼은 결과 이익이 한줌이라면 손실은 산더미와 같다.
있어야 할 각급 신하들을 정비하지 못하고 옳은 인재들이 등용되지 않은 결과 탐오의 바람이 크게 불고 백성들은 궁핍에 빠졌다.” - 경세유표 서문다산은 민생현장의 백성을 생각하며 곳곳에 배어있는 비능률적 불합리성과 관습적 허위성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우선은 국가재정의 3대요소인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을 개혁하기 위하여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토지개혁은 전론으로 경자유전, 사농균등, 협업분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화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화폐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화폐의 유통은 바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연결되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조세도 화폐로 납부하도록 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산은 전통적 권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의식과 제도를 추구하는 개혁적 시각으로 전통의 본래 가치를 다시 회복함으로써 그동안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다산식의 개혁이었다. 본래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현재 왜곡된 지식 체계를 개혁하는 것이 진정한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산의 개혁 사상은 본래의 공자와 맹자로 돌아가는 길이면서 동시에 효율과 합리를 추구하며 미래 이상을 지향하는 다산식 개혁이었다. 다산식 개혁은 다산의 독창적 방법으로 천주교 교리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천주교 교리를 내세우지 않고, 유학자로서 유학의 정통성을 내세워 배타적인 폐쇄성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다산 사상의 혁신성과 독창성은 바로 실질적인 민생현장이 그 배경으로 그의 창조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다산은 유배 18년 그의 못다 이룬 꿈인 “나라다운 나라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하여 600여권의 책 속에 그의 주장과 생각을 펼쳐놓았다. 4서6경의 경학(經學)을 통해서는 무엇보다 목민자는 자기수양으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바르게 먼저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학을 바탕으로 경세학(經世學) 즉, 조선의 국가개혁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관들의 백성을 위한 복무매뉴얼 목민심서(牧民心書), 백성들의 생명 존중에 대한 형사처벌에 대한 세부 매뉴얼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통하여 쓰러져 가는 조선의 개혁은 물론 병들고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세부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하였다.
200여년 전 다산의 개혁은 철저하게 민생 현장에서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였다. 실천적 개혁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였다. 오늘날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개혁은 과연 어떤가? 지도자는 물론 공직자 모두가 “민생이야말로 개혁의 기본이다”는 다산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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