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말려초 한국 磁窯의 계열과 변천」 - 최건(崔 健 )



  •   「라말려초 한국 磁窯의 계열과 변천」
      - 특히, 9~10세기 磁窯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 
                                                                       崔  健

    1. 머리말

    우리나라에서 磁器文化의 시작을 가리키는 靑磁의 발생시기가 통일신라시대 후기 9세기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 그리고 자기문화의 종주국이 중국이며, 또 중국의 여러 磁窯들 가운데 특히 양자강 하류 남단에 위치하는 越州窯 계통의 제작기술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청자 발생에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는 내용도 밝혀져 있다 .


    이러한 사실들은 1980년대부터 조사되기 시작한 전라남도 강진군에 분포하는 50여개소의 初期靑磁 窯址群과 경기도 용인군 서리 요지 등 전국에 분포하는 9~10세기의 초기청자 요지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청자 발생시기를 밝히려는 노력이 우리 도자사 연구의 새로운 관심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특히 발생 시기와 관련하여 문제의 열쇠를 우리 초기청자의 標識的 器種 가운데 하나인 日暈底碗[해무리굽의 완]에 두고, 이것이 중국의 唐시대 후기(8세기후기~9세기전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는 점과 관련지으면서, 늦어도 9세기중기에 발생하였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결과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초기청자의 편년 문제와 관련하여 결정적 근거가 될만한 새로운 자료가 끊이지 않고 발견되었다. 1989년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발굴한 황해도 원산리 청자요지의 유물퇴적 최상층에서 「淳化三年(992년)」, 「순화4년(993년)」이라는 절대연대가 새겨진 청자들이 다량 출토한 사실이 알려지고,  1992년 해강도자미술관 조사단에 의해 전남 강진에 분포하는 이백여개소의 청자요지에서 수집된 청자들의 조형적 특징과 양식 변천의 순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상대편년자료가 보고되었다. 또 초기청자시대를 상징하는 일훈저완 양식이 소멸한 후 그 뒤를 잇는 새로운 청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자료가 충청북도 제천군 송계리 師子瀕迅寺塔(1022년 건립)을 중심으로 한 탑의 영역 안에서 발견되어 초기청자시대의 下限을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자료로 등장하였다.


    이어서 기존에 발굴된 서리요지와 원산리요지의 규모에 뒤지지 않는 시흥 방산동요지의 발굴조사와 전남 해남군 신덕리에서 강진군의 초기청자요지와 유사하며 청자와 함께 黑磁를 제작한 요지가 삼십여개소 발견되고, 또 무덤의 부장품으로 경북 상주 청리, 대전 노은동, 경산 임당 등에서 출토한 초기청자와 동반하는 경질도기들과, 그리고 전남 영암군 聖風寺址塔 안에서 塔誌(1009년)와 함께 발견된 <靑磁有蓋鉢> 등 새로운 자료가 끊이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자료의 출현은 초기청자에 대한 연구 관점을 중국의 玉璧底(우리나라에서 日暈底라고 부름)형식 완의 전파와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국내의 생산유적지와 소비유적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자료를 대상으로 보다 더 입체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최근의 연구 관점은 청자의 발생이라는 편년문제를 넘어서 중국의 영향으로 뒤늦게 시작한 우리 자기문화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이 담겨져 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국적으로 변모하였는가, 그리고 바로 뒤잇는 시대에 소위 󰡐天下第一󰡑이라고 하는 翡色靑磁로 발전하고 세계도자사에서 유례가 없는 象嵌靑磁를 창출하게 되었는가 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이다.


    이 글은 청자의 발생기와 발전기에 속하는 9~10세기, 즉 초기청자시대에 일어났던 변화의 과정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 특징을 찾으려는 데 있다. 특별히 필자는 11세기부터 12세기전기에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창조적 원동력이 바로 초기청자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우리 자기문화가 처음 자리잡기 시작한 청자발생 단계에 대한 관심은 아주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청자문화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초기청자를 기존에 밝혀져 있는 한국식 土築窯 계열과 중국식 塼築窯 계열로 구분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두 계열의 전개과정에서, 한국적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의 첨단기술을 도입하고 당시 동남아 세계에서 유행하는 양식을 조화시킨 토축요 계열이 한국청자의 중심으로 등장하고, 중국 것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던 중국식 전축요가 소멸한 사실은 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토축요를 선택한 결과 우리는 비색청자․상감청자․辰砂청자․粉靑과 같은 독창적이며 높은 품위의 도자문화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 9~10세기 磁窯의 분류와 특징

    라말려초인 9~10세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磁器가 제작되기 시작하고 기술 및 조형의 방향이 결정되는 발생기와 발전기이다. 이것은 청자의 역사 600년에서 보면 삼분의 일에 해당되며, 전체 변천과정을 셋으로 나눌 때 초기로 구분되는 기간이다. 초기청자시대를 대표하는 표식적 유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日暈底 형식의 碗이다. 이러한 형식의 완은 전국 14개지역 100여개소의 요지에서 출토하고 있는데, 동반 기종과 장식기법 등 제작기술의 측면에서 볼 때 중기(11~12세기)의 특징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초기에는 窯構와 관련하여 耐火粘土로 쌓은 土築窯와 耐火塼으로 쌓은 塼築窯가 공존하면서 우열을 다투게 되지만, 중기에 들어서면서 전축요가 자취를 감추고 토축요로 일원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초기와 중기의 구분은 비교적 명백하다. 


    그러면 초기청자시대에 우열을 다투면서 공존하고 있었던 전국 14개지역의 磁窯들을 토축요와 전축요 계열로 나누고 그의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겠다.


    1)토축요 계열의 자요와 그 특징
       토축요 계열의 자요는 남서해안지방 3개지역에 밀집 분포하고 있다.
       ①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리․계율리․사당리, 칠량면 삼흥리 요지(49개소)
       ②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 요지(약 30개소)      

      ③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요지(3개소)    

    토축요 계열의 요지들은 낮은 산비탈에 좁고 가파른 계곡을 따라 소규모 퇴적을 수십개소씩 남기고 있다. 초기청자의 窯構가 발굴된 예가 없어서 단정할 수 없지만, 대체로 중기청자(11~12세기)의 요구(20m×1.2m)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규모로 추측된다. 초기단계의 築窯材는 작은 割石(20㎝내외의 화강암)과 내화점토를 쓰며 차차 할석 대신 폐기된 匣鉢을 쓰거나 (갑발을 사용하지 않는 가마의 경우)내화점토만으로 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窯道具는 筒形 匣鉢과 낮은 찻상 모양의 床形 갑발대 셑트와 圓柱形 陶枕, 차돌 조각을 3-4개 박은 받침대가 있다. 갑발의 규격이 거의 일정하여 일훈저완을 匣燔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발과 대접․접시․缸․甁 등의 기종은 도침을 받쳐 놓고 뚜껑 등 특수한 형태는 차돌 박은 받침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토축요 계열의 요지에서 출토하는 器種은 상대적으로(전축요 계열과 비교할 때) 다양한 편이다. 구연이 외반된 높은 굽의 常燔 鉢과 일훈저완을 중심으로, 玉緣접시․花瓣접시․內彎접시 셑트와 작은 平접시․외반접시․전접시․뚜껑접시 셑트가  뒤이어 나타나며, 廣口形 구연의 油甁․廣口甁․梅甁과 缸․盞托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일훈저완과 옥연형 화판형 내만형의 접시와 잔탁 등은 분명히 중국 당․오대 도자에 모델이 있는 중국식의 그릇들이다. 그러나 상번 발과 전접시․뚜껑접시․유병․광구병․매병․항 등의 모델은 통일신라시대의 金屬器와 硬質陶器에서 모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전통적 기종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2)전축요 계열의 자요와 그 특징
       전축요 계열의 자요는 중서부지방, 특히 해안과 큰 강가에 분포하고 있다.
       ④황해남도 평천군 봉암리 요지(2개소)
       ⑤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요지(3개소)
       ⑥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요지(3개소)   
       ⑦경기도 고양시 원흥동 요지(1개소)
       ⑧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요지(3개소)
       ⑨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중암리 요지(1개소)
       ⑩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요지(2개소: ★토축요로 전환)
       ⑪충청남도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요지(2개소)
       ⑫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요지(6개소) 
       ⑬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요지(2개소: ★토축요로 전환) 
       ⑭경상북도 칠곡군 창평리, 대구 진인동 요지(2개소)         
    위와 같은 전축요 계보의 요지를 대표하며 이미 발굴조사된 봉암리․원산리․서리․방산동 요지들은 강하구나 해안을 낀 넓은 평야지대 주변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서 토축요의 자연 환경과 큰 차이가 있다. 요지의 수는 불과 2~3개소이지만 규모가 큰 것은 직경 50~80m, 높이 3~5m 정도로 마치 작은 동산과 같은 대규모 퇴적층과 장대한 규모의 요구(40×2.2m)로서 남서해안지방의 소형 토축요와 비교하면 용적이 약 500%가 넘는 경우도 있다. 이 요들은 중국의 보편적인 축요법인 내화전(20×20×6㎝)으로 쌓은 龍窯와 거의 유사하여 중국기술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전축요의 갑발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토축요와 거의 같은 형태의 통형갑발과 상형갑발대 셑트와, 다른 하나는 전축요에서만 쓰는 鉢形 갑발과 버섯 모양의 菌形 갑발대 셑트이다. 또, 여기서는 토축요식의 낮은 원주형 도침 대신 상형갑발대를 변형시킨 것을 쓰고, 역시 토축요식의 규석 박은 받침대 대신 월주요식의 반지형 받침을 사용하고 있다.


    전축요 계열의 요지에서 출토하는 기종은 상대적으로(토축요 계열과 비교할 때) 단순한 편이다. 소위 先日暈底 형식의 발과 완을 중심으로, 옥연접시․화판접시․내만접시 셑트가 나타나며, 외반 구연의 유병․잔탁․병․주자 등이 있다. 이 형태들은 대부분 중국 당․오대 도자를 모델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토축요에서 보는 굽 높은 발과 전접시․뚜껑접시․유병․광구병․항․매병 등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기와 경질도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국적 형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점은 중국식 형태와 한국식 형태가 공존하는 토축요와 명백하게 구분되는 특징이다
    .

    3)토축요와 전축요 계열의 차이점과 그 의미
    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窯構와 축요법․요도구․燔法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들은 제작기술의 전파 과정과 계통을 파악하는 결정적 요소이며 제작체제를 재구성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 본 내용들은 토축요와 전축요의 제작기술이 계통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게 해 준다. 요구의 구조 및 규모, 축요재는 물론 요도구, 기종과 형태, 그리고 釉胎의 색까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 계열의 원류가 각각 다르며 별도의 제작방법을 갖고 있음을 대변하는 내용이다.


    토축요는, -당시 중국이 대규모 전축요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구의 구조는 중국의 龍窯를 기본적으로 따르면서 축요법은 전통적 방법을 응용하여 소형화시킨 󰡐한국형 窯構󰡑라고 부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전축요는 󰡐중국형 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갑발과 요도구가 각각 다른 점도 특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중국 측의 요도구에 대한 상세하며 신뢰도 높은 자료를 파악하지 못하여 확신할 수 없지만, 한국 초기청자의 전축요의 경우는 대체로 당․오대의 경향과 유사해 보인다. 전축요에는 중국 越州窯에서 보는 것과 같은 반지형 받침이 있다. 이것의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완과 발을 고급화시키기 시작하는 당후기(8세기후기)부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오대 월주요에 같은 형태의 받침을 높고 외반된 굽의 발을 받치는데 사용하고 있어서 한국 전축요와의 영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토축요에는 반지형 받침 대신 차돌 박은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는 점차 기능과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고급청자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그 가운데 작은 원반 형태의 받침대는 중기청자시대(11,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크게 성행하는 대표적 요도구로서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도구라고 생각된다. 토축요의 낮은 陶枕과 전축요에서 도침의 대용으로 사용했던 상형갑발대도 각각 구분되고 있는 요소이다.


    器種과 형태에 있어서, 일훈저형식의 완과 옥연접시․화판접시․내만접시와 같이 당시 동아시아적으로 유행했던 기종들은 양 계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口緣外反의 높은 常燔鉢과 뚜껑접시․전접시․유병․광구병․매병 등 한국적 기종들은 오직 토축요에서만 제작되며, 갑번발․외반구연의 유병과 병․주자 등 중국 당․오대의 기종과 유사한 것들은 전축요의 전유물이다.


    사실 이러한 판단은 요구와 기종 등 여러 요소를 살필 필요도 없이 단지 유태의 색 하나만 보아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청자의 특징 중에 하나인, 소위 翡色이라고 불리는 맑고 투명한 淡綠色을 띠는 회청색 유태의 초보적 상태를 이미 9~10세기의 토축요 계열의 청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렇다.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전축요 청자의 유태 색은, 그들의 모델이 중국 청자인 것과 같이, 중국 청자의 색인 오리브-그린 색이며,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갖는 경우에 약간 밝은 회청색이 잠시 나타나지만 대체적인 것은 역시 황녹색에서 녹갈색 계통에 가깝다.


    이렇게 보았을 때, 토축요는 한국적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의 첨단기술과 당시 동아시아의 유행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재구성한 창조적인 것이며, 전축요는 중국의 것을 그대로 한반도에 이식시킨 모방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3. 한국 자요의 변천과 흥망성쇠

    앞에서 토축요와 전축요의 요구와 요도구 및 생산품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라말려초 9~10세기에 전국적으로 우후죽순과 같이 난립하여 있던 두가지 계열의 자요들은 대부분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다가 일시에 쇠퇴, 소멸하고 고려 지배계층의 취향에 맞는(또는 지배계층이 선택한) 전라남도 강진군의 토축요만 유일하게 남게 된다. 즉 전국의 중국형 전축요가 소멸하고 한국형 토축요가 유일한 적통을 계승하여 한국의 자기문화를 이끌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중국자기를 그대로 모방했던 전축요가 적통을 계승했다면 고려의 비색청자․상감청자와 粉靑이라는 말은 세계도자의 역사에서 자취를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에 자요가 시작하는 초창기부터 양대 계열의 자요가 공존하는 시기, 그리고 전축요가 소멸하고 토축요가 중심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양대 계열의 자요가 공존하는 시기의 上限은 앞으로 자료를 보완하여 규명해야할 문제이지만, 下限의 경우는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각 계열마다 알려져 있는 절대편년자료를 양식 변천 과정에서 파악된 상대편년에 대입하여 추적한다면 납득할만한 하한을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전축요의 소멸시기를 가르키는 절대편년자료는 황해남도 원산리제 2호요지 제 4층(최상층)에서 출토한 <「淳化三年, 992)」명 청자>들이다. 발굴 보고자는, 이 요지의 퇴적층 제 1․2층에서 유태가 우수한 청자와 花瓣形접시가 출토하고, 제 3층에서 定宗(946~949년)의 安陵 출토 청자와 유태 및 조형이 유사한 발과 화형접시, 그리고 최상층에서 이 절대연대가 새겨진 청자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강도자미술관이 발굴 조사한 전축요 계열의 시흥 방산동요지의 경우 요구와 유물의 형식이 대체로 이것들과 유사하여 방산동도 원산리와 같은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원산리 3, 4호요지 유물이 갑자기 조질화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방산동요지에서 최상층 유물이 조질화된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며, 이 두 요지의 청자에 10세기후반 이후의 새로운 중국청자 양식이 나타나지 않는 점에서, 10세기후반에 급속히 쇠퇴하여 11세기초 이전에 소멸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이다. 보고자는 이 절대편년자료가 제 2호요지 퇴적의 최상층이며 마지막 단계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양식을 보이는 전국의 전축요들의 소멸시기도 대체로 「순화3년(992)」이 가르키는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축요의 경우 11세기전기의 절대편년자료가 2건 있어서 소급 적용이 가능하다. 하나는, 전남 영암군 聖風寺址 오층석탑 사리공에서 나온 <塔誌石(「統和二十七年, 1009)>과 동반한 <靑磁有蓋鉢>로서,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기를 모델로 한 강진 초기청자의 표식적 기종 중에 하나인 유개발과 유사하다. 이 탑에서 발견된 유개발은 규모가 작아지고 양감이 크게 줄어든 것인데, 이러한 경향은 강진요지의 일훈저완의 말기(10세기후기)형식과 동반하는 유개발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일훈저완의 말기형식은 유태가 조질화되고 소형화되는 경향­이 경향은 다른 표식적 기종인 발과 화판접시․전접시․광구병 등에서도 같다­이 나타나는데, 이와 동시에 중국 五代․北宋 도자와 같은 새로운 기종이 출현하고 음각기법으로 국당초문․연판문․파도어문․앵무문 등 다양한 문양 소재들이 등장하여 素文을 특징으로 하는 초기청자시대는 끝나게 된다.
    .
    다른 하나는 충북 제천 송계리 師子瀕迅寺址塔(1022년 건립)이 있는 청자요지와 그 출토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초기청자의 하한이다. 이 탑의 주변에서 구연 밑에 음각선이 있는 발과 음각 앵무문과 음각 연판문이 새겨진 발과 접시 등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일훈저완의 말기형식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 오대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료들을 검토하면, 강진에서 11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해 왔던 중기청자가 지방에서도 1022년경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토축요에 있어서 초기청자시대의 하한이 늦어도 10세기말기로 좁혀진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양대 계열의 편년자료를 기준으로 볼 때, 늦어도 11세기초기까지는 토축요와 전축요가 공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전축요에서 중국의 11세기 양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오히려 이 때에 와서 중국과 교류관계가 빈번함에도 불구하고), 원산리요의 하한을 가리키는 시기(淳化三年; 992)를 고려한다면, 전축요 계열이 10세기말기에 와서 급속히 중심에서 벗어나 조질화 되면서 쇠퇴하고 곧 소멸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4. 맺음말, 강진청자의 승리와 그 의미

    이제까지 라말려초 9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한국 자기문화의 초창기를 열었던 대표적 磁器窯들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초창기 자기요들은 생산시설과 규모는 물론 생산품 등 전반적 성격이 토축요 계열과 전축요 계열로 분명하게 양분되어 있는데, 토축요가 중국 도자의 첨단기술과 한국적 전통을 조화시킨 한국형 자기라고 한다면, 전축요는 중국 도자를 그대로 이식시킨 중국형 자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자기문화 초창기의 수요여건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십 여 개소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전축요들과 규모는 작지만 백 여 개소의 토축요가 한반도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추측은 고려시대 강진요지의 기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선시대 官窯인 司饔院 分院의 규모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500년간 경기도 광주의 백자요지가 약 300개소이며, 고려시대 500년간 강진 청자요지는 약 200개소이다. 이 요지 수를 고려하면, 백년동안에 약 40~60개소의 요가 운영되었고 10년을 주기로 일정한 구역 안에 대체로 5개소 정도의 요가 공존하였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초기청자시대 중에서 -초창기인 9세기를 제외하고- 발전기인 10세기 100년동안에 강진과 사옹원 분원과 같은 소규모의 요를 기준으로 할 때, 40~50개소의 요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관련하면 9~10세기에 해당하는 전국의 초기청자 요지가 지나치게 많으며, 결과적으로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들 중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요들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특히 한국적 관습과 기능과 다른 중국식 전축요의 청자가 소멸된 것은 마치 정해진 순서와 같이 자연스런 결과라고 생각된다. 


    고급청자의 주요 소비처인 수도 개경에 인접하거나 근거리에 있는 수많은 전축요산 청자들을 물리치고, 가장 원거리에 있고 규모도 작은 강진의 토축요산 청자를 선택했던 고려의 지배계층은 다름 아닌 자기생산의 주체이며 소비의 주체였다. 이러한 주체들의 조형감각과 구조적 여건들이 소비처인 개성과 가장 먼 거리의 한반도 끝에 있는 강진요 청자를 선택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선택의 사건, 즉 전남 강진 청자인 토축요의 승리는 한국의 청자가 중국의 기술적 영향에서 재빨리 벗어나 독자적이며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불과 백 여 년이 지난 12세기전기 자기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의 상류사회에서,󰡐고려 청자가 천하제일󰡑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고려인의 수준 높은 조형감각과 과감한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선택의 시기는 고려의 문물제도와 중앙집권화가 구체화되는 10세기말부터 11세기초 사이에 있었다. 이 때부터 강진요는 생산과 소비의 주체인 중앙 지배계층의 취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명실공히 고려의 대표 자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만약 이 주체들이 중국식 전축요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자기문화에 있어서 고려의 위치는 영원히 중국의 변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불운의 연속이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세계도자의 역사에서 天工術이라고 평가하는 비색청자와 상감청자, 진사기법에 대한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역시 세계도자에서 독특한 별개의 장르인 분청사기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원문과 주석이 혼재되어 일반 대중들이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울 것 같아 주석을 별도로 분리하여 원문 하단에 실었습니다.


    주석)

    1) 처음 청자발생시기를 통일신라시대후기로 추정한 尾崎洵盛은, 󰡒한국 청자의 모델이 되었던 중국 월주요 청자는 성당대(약 680-750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倣造는 늦어도 약 1세기 이후 興德王代(826-835년)에 이루어 졌다.󰡓고 하면서 9세기 통일신라시대후기 발생설을 제기하였다(「高麗陶磁の起源に關する問題の考察」,󰡔陶說󰡕 82.85-88, 1960참조). 이어서 吉岡完佑는, 강진의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기종인 일훈저완이 중국의 경우 9세기의 특징으로 보고, 강진이 장보고의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에 인접해 있으며 특히 중국과 문물의 교류가 활발했던 청해진시대에 중국과 똑 같은 청자를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高麗靑磁의 發生에 관한 硏究󰡕, 숭전대학교박물관, 1979 참조).


    2) 한국에서 처음 만들었던 청자들이 중국 越州窯 청자의 제작기술 및 조형과 유사하다고 보고, 중국의 절대적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월주요 기원설는 小山富士夫가 제기하였다(「高麗の古陶磁」,󰡔陶器講座󰡕22卷, 雄山閣, 1937). 그 이후, 高裕燮(1939), 野守健(1945), 尾崎洵盛(1960), 吉岡完佑(1979), 長谷部樂爾(1971), 崔淳雨(1979), 鄭良謨(1979), 崔  健(1987), 金載悅(1988) 등이 그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새로운 자료들을 보완하여 월주요 기원설을 지지한 바 있다.


    3) 여러 요지들 가운데 강진군 용운리를 중심으로 계율리, 사당리, 삼흥리 등에 밀집 분포하는 초기청자시대의 요지는 50여개소에 이른다. 초기청자의 경우 양식 변천 과정이 눈에 쉽게 띄지 않는 특성을 갖지만, 표식적 기종인 일훈저완의 형태 변화를 기준으로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崔 健, 「韓國初期靑磁の分類と變遷」,󰡔東洋陶磁󰡕Vol 22, pp.45~50과 두 단계로 구분한, 󰡔康津의 靑磁窯址󰡕, 海剛陶磁美術館, 1992, p.28의 表<Ⅱ-1. 類型 分類 略解>를 참조 하라).


    4) 절대편년이 있는 당․오대․북송시대의 분묘와 탑 등의 유적에서 출토한 자료가 龜井明德에 의해 조사 발표되었다(「唐代玉璧高臺の出現と消滅時期に考察」,󰡔貿易陶磁󰡕12.1993참조). 중국에서 조사된 239개소의 유적에서 절대편년 일훈저완 18건과 상대편년 6건을 검토한 결과, 7~8세기를 맹아기로 보고 8세기 4/4분기에 증가하며 9세기전반을 성행기, 9세기후반은 소멸기이며 874년을 끝으로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과 한국 측의자료는, 崔  健, 「高麗靑磁의 發生問題-고려청자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美術史論壇󰡕.창간호, 1995, pp.283-284참조.


    5) 원산리 요지는 1989-90년 발굴하여 현장에 복원․전시되어 있다(김영진, 「황해남도봉천군 원산리청자요지 발굴간략보고」,󰡔조선고고연구󰡕1991-2와 󰡔조선도자사연구󰡕三國~高麗, 춘추각, 1995). 요지 복원 이후 현장을 직접 답사한 南秀雄의 「圓山里窯跡と開城周辺の靑磁資料」,󰡔東洋陶磁󰡕Vol.22, 東洋陶磁學會, 1992-94, pp.105-120가 있으며, 비교적 상태가 좋은 사진 자료는, 󰡔조선유적유물도감󰡕.12권.고려편.3,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2에 게재되어 있다.


    6) 강진 청자요지의 변천과정에 관한 초보적 연구는 野守建이 하였다(󰡔高麗陶磁の硏究󰡕, 淸閑舍, 1945). 해방이후 지표조사 보고서는, 崔淳雨, 󰡔韓國靑磁陶窯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에 전국의 청자요지가 포함되어 있고, 특히 강진 청자요지에 관해서, 해강도자미술관에서 1991년 정밀한 지표조사 자료를 종합 분석한 보고서가 있다(󰡔康津의 靑磁窯址󰡕Ⅰ.Ⅱ冊, 海康陶磁美術館․康津郡, 1992). 이 보고서에 의하면, 강진에는 188개소의 가마터가 있는데, 출토품의 양식을 기준으로 日暈底碗 계통과 輪形底의 陰‧陽刻靑磁 계통, 象嵌靑磁 계통의 요지 수는 45개소, 130개소, 92개소로 나뉘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약 80개소는 동일한 장소에서 시대 양식이 다른 두가지가 공존하고 있음이 밝혀져 있다.


    7) 1986년 전남 영암군 聖風寺址五層石塔 舍利孔에서 <「統和二十七年(1009)」銘 塔誌石>과 함께 발견된 <靑磁 素文 有蓋碗>으로 통일신라시대 금속제 有蓋鉢과 안압지출토 陶器有蓋鉢과 형식이 같은 계통으로 초기청자시대의 표식적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유개완은 전형적인 한국식 일훈저완과 동반하는 유개발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데, 이러한 현상은 일훈저완의 소멸 단계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판단하고있다. 이 유개완과 탑지의 도판(국립중앙박물관, 󰡔佛舍利莊嚴󰡕,1991, p.76)참조 바람.


    8) 塼築窯와 土築窯에 관해서는, 崔 健, 「韓國初期靑磁の分類と變遷」,󰡔東洋陶磁󰡕Vol.22,1992-4와, 「靑磁窯址의 系譜와 展開」,󰡔미술사연구󰡕제12호, 1998을 참조하라. 전축요는 일정한 규격의 耐火塼을 써서 쌓았기 때문에 벽돌로 쌓은 가마라는 뜻에서 ‘塼築窯’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물론 토축요의 경우에도 내화토만을 쓰지 않고 일부 石材와 망숭이(가마 쌓기 위하여 마치 큰 참외와 같은 형태로 빚은 내화토 덩어리)를 함께 쓰고 있어서 순수한 토축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축요의 벽돌’과 비교되는 ‘흙으로 쌓았다’라는 점에서 ‘土築窯’라고 표현하였다.


    9) 초기청자와 바로 그 다음 단계인 세련기 청자의 구분은 비교적 분명하다. 예컨대, 초기청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문양이 없는 󰡐素文󰡑이라는 점에서 보면, 전축요 계통의 선일훈저완을 동반하는 요지인 원산리․서리 4-2층․오사리․원흥동․방산동 등은 거의 대부분 소문이며, 토축요 계통의 한국식일훈저완을 동반하는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에 요지․해남 화원면 요지, 고흥 운대리 등도 대부분 소문이어서 초기청자시대에는 모두 소문이 기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축요계통은 이 단계에서 소멸하기 때문에 대상이 될 수 없고, 계속 이어지면서 번성하는 강진요지의 경우에는 다음 단계와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즉 한국식일훈저가 소멸하면서 예리한 음각의 국화당초문․파도어문․초화문 등이 새로 나타나면서 완전한 輪形底로 전환되어 소위 세련기 청자로 접어들게 된다(崔 健, 「韓國初期靑磁の分類と變遷」,󰡔東洋陶磁󰡕Vol 22, 1992과, 󰡔康津의 靑磁窯址󰡕, 海剛陶磁美術館, 1992, p.28의 表<Ⅱ-1. 類型 分類 略解>, 崔  健, 「靑磁窯址의 系譜와 展開」,󰡔미술사연구󰡕제12호, 1988을 참조).


    10) 해남 화원면 신덕리에 분포하는 약 30여개소(추정)의 요는 초기청자의 표식적 유물인 일훈저완을 동반하면서 일부 黑釉磁도 제작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강진의 초기청자와 대체로 유사하지만 器種이 다양하지 않고 丸彫蓮瓣文도 나타나지 않으며 완전한 素文이다. 소위 일훈저 형식의 쇠퇴과정에서 輪形底 형식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소멸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덕리요는 1998년 알려지기 시작하여 해남 초등학교 교사 변남주선생이 최초로 보고하였고(󰡔해남신문󰡕410-419호, 1999), 필자도 변남주선생의 호의로 지표 수집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그 후 광주박물관이 지표조사하였다(󰡔海南新德里靑磁陶窯址精密地表調査報告書󰡕, 국립광주박물관, 2000).


    11) 국립광주박물관, 󰡔전남지방도요지조사보고-Ⅱ-󰡕, 국립광주박물관, 1988참조.


    12) 토기와 관련문제는, 崔  健, 「統一新羅時代 硬質陶器의 傳統繼承과 中國陶磁文化의 受容에 관하여」,󰡔韓國磁器發生에 관한 諸問題󰡕 第 1回東垣記念學術大會發表要旨, 1990, pp.21~27 참조.


    13) 崔  健, 「韓國初期靑磁の分類と變遷」,󰡔東洋陶磁󰡕Vol 22, 1994.


    14) 이 문제들에 관해서 필자의 간략한 해설이 있다.󰡔康津의 靑磁窯址󰡕, 海剛陶磁美術館, 1992과, 「靑磁窯址의 系譜와 展開」,󰡔미술사연구󰡕,제12호, 1998을 참조 바람.


    15) 원산리 요지에 대한 조사 및 연구 성과는 비교적 풍부하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김영진은, 「황해남도봉천군 원산리청자요지 발굴간략보고」,󰡔조선고고연구󰡕1991-2와 󰡔조선도자사연구󰡕三國~高麗, 춘추각, 1995)에서 편년자료의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6) 海剛陶磁美術館, 󰡔芳山大窯󰡕 學術叢書 第12冊, 2001 참조.


    17) 이러한 현상은 강진의 청자요지 조사에서 상대편년자료를 활용하여 밝혀진 것이다(海剛陶磁美術館, 󰡔康津의 靑磁窯址󰡕, 1992 참조).


    18) 이 사자빈신사지 주변에 청자편이 흩어져 있고 요지의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원광대학교 김정희 교수님과 충북대학교 박은순 교수님이 해 주셨다. 깊이 감사드린다.


     필자는 이 곳을 몇 차례 조사하면서, 가마터를 정지 작업하고 그 영역 안에(가마터의 폐기물을 걷어낸 다음) 탑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이 곳에 요지 폐기물(가마벽 조각, 불에 익은 흙, 도침, 녹아 붙어있는 청자 조각과 흙)이 탑을 중심으로 15m 안 지표상에 밀집분포하고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탑의 하층 기단 중대석에는 1022년(顯宗13年, 太平 2年 4月)에 조성했다는 명문이 있어서, 청자가마 운영시기와 탑의 조성시기가 어떻게든 연관된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따라서 세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청자가마가 폐쇠된 이후 1022년에 동일구역 안에 탑을 조성했을 경우, 둘째는 탑을 조성한 1022년을 기준으로 일정기간 운영되었을 경우, 세번째는 청자가마 운영기간과 관련 없이 다른 장소에서 1022년에 조성되었던 탑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이 장소로 이전되었을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 탑이 조성된 1022년에 사찰 내부에서도 가장 중심인 탑 바로 옆(15m이내)에서 청자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외로 할 수 있지만, 세 번째의 경우 가능성을 심각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교원대학교 정영호 교수님과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님께 문의한 바, 한결같이 탑을 이전했을 가능성은 현재로서 찾을 수 없으며 탑과 청자가마가 동일한 시기에 운영되었을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다는 말씀을 주셨다.


    이렇게 보아 오면, 첫째 경우의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다. 즉 청자가마가 운영되고 있던 시기나 아니면 폐쇠된 후 1022년에 탑을 조성한 것이 되며, 따라서 이 가마 출토 청자의 하한은 1022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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