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
최 건(陶磁史)
1. 머리글 -도기문화에서 청자문화로―
지구상에 처음 陶器가 출현한 때는 약 일만 년 전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이때에 와서 인류는 60만년이 넘는 어두운 야생의 시대를 넘어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다. 움집 같은 구조물을 짓고, 옷감을 짜며 장신구를 만들어 몸치장을 하고 사냥과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한편, 粘土를 빚고 구워서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발명의 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이 새로운 발명품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연물을 단순 응용하거나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오직 점토로 만들고 구워낸 그릇은 단순함을 넘어 지구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차원으로 인류 최초의 化合物이자 순수한 創造物로 알려져 있다.
근대 18세기 이전까지, 구대륙의 陶磁文化는 ‘동아시아의 高火度磁器 문화’와 ‘서아시아 유럽의 低火度陶器 문화’로 양분되어 있었다. 물론 초창기인 신석기시대에는 양쪽 모두 저화도 도기로 같은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중심인 중국은 오랜 도기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화도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킨 결과 8세기경 세계 최초로 磁器質 靑磁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어 9세기경 한반도에서도 그것에 뒤지지 않는 우수한 청자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자기질 청자의 완성은 金銀이나 玉石 그릇, 그리고 木漆器 등 천연 소재를 단순 가공했던 소박한 工藝 素材에서, 매장량이 무한하며 염가인 원료[粘土]를 고차원의 과학기술로 가공하고 아름다움이란 高附加價値를 강화시킨 새로운 공예 소재가 인류사회에 등장했음을 알리는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2. 고려청자의 특수 여건 -중국과 비교하여-
한반도에서 청자 제작은 중국 기술의 적극적 영향으로 9세기경 시작되었다. 전개 과정에서 중국 것과 다른 독자적 개성이 하나하나 나타나면서 고려사회에 어울리는 청자를 만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자연 환경과 인문 환경이 중국과 다르고 특히 청자 제작과 소비 주체인 고려사회의 지도층들이 중국과 다른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고려의 제도화된 중앙집권체제는 청자 전개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청자시대(9~10세기)에 전국 각지에 산재하고 있던 십 수 개소의 靑磁窯(가마)들이 10세기후기에 거의 대부분 축소되거나 廢窯된 것도 강력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유일하게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전남 康津窯와 그 주변요만 특별히 선택되어 한국 청자의 적통을 계승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강진요의 주변과 각 지방에서 수많은 周邊窯들이 우후죽순과 같은 형세로 가마를 세우고 쓰러지고 했지만, 항상 중심이며 수준 높은 청자를 생산한 강진요를 뛰어넘지 못했다. 주변 청자요들은 스스로 독자적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강진 청자의 모방이나 지방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고려시대의 청자가 강진요 중심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된 것과 달리, 중국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고려시대 10~14세기 동안 중국은 수준 높은 문화민족인 漢族과 상대적으로 낮은 북방 유목민족들과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 안에 있었으며, 唐末 五代十國의 혼란 이후 송(宋)이 통일하면서 북방의 僚, 金, 元과 차례로 대치하다가 원이 통일하고 다시 明이 들어서는 등 실로 복잡한 왕조의 역사를 거쳤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사회적 변동에 따라 청자도 越州窯, 耀州窯, 汝窯, 南宋官窯, 龍泉窯가 줄지어 중심으로 등장하고 다시 주변으로 물러나고 도태되면서 양식과 제작기술은 물론 미적 관심까지 크게 다른 다양한 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반면 청자시대 500년을 시종일관했던 한국은 청자 제작 주체가 갖고 있는 일관된 미적 관심 아래 중국과 지속적 교류를 유지하는 한편 고려 나름의 독자적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고려사회의 일정한 방향으로의 관심이 청자의 기술력과 표현력을 초정밀 고밀도로 차원을 높이고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3. 청자의 조형적 특징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자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맑고 투명한 翡色 유약을 완성한 것이나 독창적인 상감기법을 만들어 낸 것 등은 고려시대는 물론 오늘 우리의 자랑이기도 하다. 더구나 고화도 유약 층 아래 酸化銅을 이용한 붉은 색 辰砂를 처음 발견했고 백토와 흑토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다양한 장식기법을 개발해 낸 일과 같이 세계도자의 역사에 뚜렷한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이 가졌던 끈질긴 탐구 정신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탐구의 정신이 청자 종주국인 중국의 그늘 밑을 과감하게 벗어나 독자적 발전을 해 나갈 수 있는 저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청자의 초창기에 중국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고려사회의 전통적 관습과 미적 정서는 중국으로부터 배워 온 청자를 아주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고려인들은 중국 청자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자연을 관찰하면서 얻은 새로운 영감을 완성도 높게 표현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중국에서 관념적으로 정형화된 식물 문양은 실제 자연물을 관찰하면서 얻어낸 생명감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고 고려인들이 동경하는 서정적이며 시적(詩的) 자연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엄숙하고 중량감 있는 중국의 관념적 형태가 경쾌하며 생명의 힘이 느껴지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맑고 투명한 유약은 한국 청자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 가장 절대적 요소가 되었다. 유약이 투명하면 청자 바탕에 새겨진 가늘고 미세한 흔적까지도 예민하게 나타나게 된다. 유약이 탁하고 불투명할 경우에 요철이 커지고 강한 표현을 써야하며 장식을 복잡하게 붙이거나 과장된 형태가 불가피해 진다. 그러나 투명한 유약은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모든 문양과 장식은 간결 단순하고 靜的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청자가 중국의 動的이며 웅대함과는 달리 정적이며 단아한 경향으로 나가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청자는 칼로 새기는 음각과 양각의 입체적 경향을 지나 흑과 백색으로 표현되는 평면적 경향으로 바뀌어 가면서 상대적으로 공예적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불필요하고 지나친 격식이나 덧붙이는 장식이 없어지고 그릇 자체의 단순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실용성이 높아졌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입체적 조형미를 추구하던 비색청자 시대와 평면적 장식문양(회화성이 매우 높은)을 추구하던 상감청자 시대를 지나면서 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깊어지는 한편 보편화와 실용화라는 측면도 긍정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후기는 오랜 몽고의 침입과 간섭을 받는 등 사회전반에 걸쳐 현실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고 있었던 절박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청자를 보편화시키고 실용화시켜는 일은 고려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상감청자는 더 이상 귀족적으로 우아하다거나 세련됨과는 다른 방향으로 제작할 필요가 있었다. 건강하고 간소한, 그리고 실용적인 형태로 탈바꿈하면서 소량 정예품 생산체제에서 다량 생산체제로 목표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접어든 것이다.
4. 조선초기 15세기의 청자, 분청, 그리고 백자
조선 15~16세기는 백자와 粉靑(粉靑沙器), 그리고 조선식 청자와 黑釉磁를 포함한 다양한 材質의 도자가 공존하던 시대였다. 청자를 계승한 분청이 전국각지에서 다량 생산되고 일상의 보편적 자기로 확산되면서, 한편 새로운 차원의 특별한 백자가 시작되는, 말 그대로 조형적이나 사회적 기능의 측면에서도 다양성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분청과 백자는 조선시대 전기 도자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분청이 중앙관청과 사회지도층의 도자라고 한다면, 백자는 왕실의 중심에 있는 도자라고 말 할 수 있다. 당시 大殿에서는 오직 上品 匣燔 백자가, 중앙 관청과 사회지도층은 下品 常白磁와 印花와 象嵌기법의 분청이, 사회일반과 지방 수요에는 질이 떨어지는 상감과 분장기법의 분청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점차 분청에 비해 백자의 장점이 널리 알려지고 중앙관청과 사회지도층이 백자를 선호하게 되면서 조선 도자문화 전반에 걸친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변화의 결정적 계기는 왕실과 국가에서 쓸 그릇을 전국 각지에서 貢納받던 제도 대신 국가가 직접 생산하는 官窯體制로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중앙관요는 왕실과 국가의 대의명분을 위한 각종 백자 儀禮器와 생활필수품을 국가차원에서 집중 생산하게 되었다.
5. 백자문화시대
대부분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라고 말하며, 불교의 색은 청색, 유교의 색은 백색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陶磁의 색은 왕조나 사상과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다. 청자에서 백자로 전환은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도자의 큰 흐름이며 청자라는 소재보다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더 강하며 실용성이 높아진 백자라는 소재로 바뀌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백자도 고려시대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도자의 주류이며 대표성이 청자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를 청자문화시대라고 부르고, 뒤이은 조선시대를 백자문화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럽 제국이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드는 15세기는 한반도에도 새로운 왕국 조선이 나라의 기반을 든든히 하고 문예부흥정책을 주도하여 세계적 수준의 선진 문화국가로 등장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춰 한반도의 도자문화도 14세기 중엽 세계 최초로 중국 景德鎭窯에서 완성한 경질백자 기술을 15세기 전기에 과감하게 받아드리고, 이어 조선적 정서에 맞게 재구성하는 성과를 이루어 냈다.
조선인들은 맑고 깨끗한 潔白의 바탕 위에 청신하면서 기품 있는 淸靑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龍樽이나 花器 같이 왕실과 국가적 차원의 그릇은 禮論에서 정해진 형식에 따라 500년간 큰 변화 없이 鎭重하고 위엄 있게 그리는 반면, 儉朴한 사대부를 상징하는 사군자는 넓은 여백에 가는 선을 아끼며 그려 넣어, 중국 것과 같이 웅장하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라, 위엄스러우면서 사치하지 않은 새로운 백자를 만들었다.
16세기후기부터 士大夫의 영향력이 커지고 그들의 정서가 조선사회 전반을 이끌어 나갔다. 조선 사대부들은 사치를 배격하고 절제와 지조를 바탕으로 淸貧樂道의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생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은 백자를 만들 때에도 복잡하고 사치스러운 장식을 멀리하고 간결함과 여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20)은 한국사회에 심각한 물적 인적 피해를 주었다. 특히 침략국인 淸에 대한 반감은 청이 주도하던 세계도자의 흐름인 호화롭고 복잡한 기교와 장식을 따르기보다, 도자기의 본질을 존중하고 그를 이어가려는 독자적 의지를 갖게 하였다. 조형은 극히 단순해지고 문양을 넣을 때에도 사군자나 야생의 풀꽃을 간결한 필치로 그려 넣는 수준을 절대 넘어서지 않았다. 그들은 호화로운 장식보다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지적엘리트들이 추구하였던 성리학적 儉素 儉約의 정신과 부합되는 것으로, 말 그대로 시대정신과 조형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력을 회복한 조선은 전반적인 산업발전과 해외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문물에 눈뜨면서 당시 세계사적 물결인 문예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백자도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새로운 양식들이 등장하여 최대의 성행을 누릴 수 있었다. 釉胎의 질이 더욱 향상되어 완전한 백자를 완성하는 한편, 검소 검약의 미의식을 더욱 심화시켜 간결하고 단아한 純白의 조형으로 일관하면서 장식은 극도로 절제하여 최소한의 표현에 그치게 하였다.
이러한 조선백자의 경향은 淸과 일본의 도자기에 있는 호화스럽고 농염한 귀족 취향과는 뿌리부터 다른 것이었다. 文房具가 다양하게 발달하고, 19세기부터 다종다양한 器種과 장식의장이 발달하는 등 조선중기와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나타내며 다양한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이은 제국주의 열강의 정치 경제적 압력은 순수한 백자의 본질을 추구하여 왔던 조선의 陶磁觀을 혼란시키고 官窯를 무력화 시켰으며, 뒤이어 경술국치와 함께 500년 지켜 온 조선적 전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6. 백자 조형의 특징
조선백자의 특징은 중국과 일본, 유럽제국의 백자들과 비교할 때 분명히 나타난다. 원래 조선은 元末明初에 중국 景德鎭 백자 기술을 처음 받아 드리면서 그것을 백자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중요시하고 보수적인 왕실과 사대부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했던 조선백자에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였다. 이 변화는 일반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활발해진 私貿易을 통해 들어 온 중국과 일본의 多彩色 백자가 일부 조선사회에 유통되면서 시작하였다. 푸른색 안료로 간결한 그림을 그리던 조선백자의 오랜 관행을 깨고 비로소 다채색이 시작된 것이다.
고화도 자기의 세계에서 釉上彩와 釉下彩의 구분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유상채의 경우, 고화도로 구워 낸 후 저화도 彩料로 장식하고 다시 낮은 온도로 굽기 때문에 제작과정이 복잡해지는 단점이 있는 반면, 선명하며 다양한 색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18세기에 관요백자의 일각에서 시도했던 靑畵와 鐵畵, 辰砂를 같이 쓰는 다채색 기법과 청화나 진사 안료를 전면에 바르는 기법, 그리고 浮彫와 같은 양각기법 등과 같이 어울려 다양한 장식효과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들은 수입된 다채색백자가 끼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중국과 일본처럼 손쉽고 화려한 색채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저화도 유상채를 사용하지 않고 고난도의 유하채를 써서 진중한 색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이러한 일관된 제작 경향은 자연의 본질을 감추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내재되어 있는 미적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의 知的엘리트들의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표면의 화려함 보다 내면의 진중함에서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세련된 미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7. 맺음말 -조선백자의 美意識-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 겪었던 가치관의 변화는 심각한 갈등을 동반하였다. 그 가운데 우리의 핵심적 특장이었던 도덕적이며 물질의 본성을 중요시 했던 理想主義의 도자가 산업화 상품화를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 열강의 重商主義의 도자에 무릎을 꿇었던 일은 정말 심각한 갈등이었다. 전통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주변의 우수한 선진문화를 엄선하여 받아들이고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거듭해 왔던 우리 도자문화의 일관된 의지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부정적이며 타의적인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말이다.
조선백자는 원료가 정제된 고품위의 재질과 고화도 환원염 번조로 완벽한 경질백자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器種은 단순 간결하고, 장식적 요소를 가능한 생략하여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준수한 형태를 기준으로 하고, 순 백색 바탕을 존중하되 꼭 필요한 경우 청결을 상징하는 푸른색 안료로 함축된 정신세계를 節制의 과정을 통하여 표현하는 정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드믄 경우이지만, 청화안료 외에 다른 색을 사용할 때에도, 손쉬운 저화도 유상채를 쓰지 않고 고난도의 고화도 유하채를 사용하여 표면적인 화려한 색채 보다 내면의 진중한 색을 이끌어 내려 했는데, 아마 이러한 고품위에 대한 자부심이 화려한 디자인으로 장식된 중국과 일본과 유럽세계가 지향했던 重商主義的 陶磁觀과 달리 조선 독자의 道德主義的 陶磁觀를 형성하게 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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