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방의 돌담, 병영(兵營) 마을 옛 담장

  • 고인돌과 어우러진 담장…선사시대 유적



  • 병영마을 담장 전경 - 산, 가옥, 담장, 길, 경작지가 조망된다




    고인돌과 어울어진 담장, 선사시대 유적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경작지, 살림집과 함께 생활공간화 되었다. 고인돌 옆의 일부 담장은 시대 편의를 따라 시멘블럭담이 되었다.


  • ‘강진 병영(兵營)마을 옛 담장’은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 박동리, 성동리, 삼인리, 성남리의 다섯 개 리 일원에 소재하며 등록 고시 지적은 4,371,716㎡(지로리 291-1번지 등 923필지)이다. 등록문화재 제264호(2006.06.19 등록 고시)이다.
    병영마을은 행정구역으로서 자연마을이라기 보다는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본부이자 훈련소라 할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사적 제397호)의 역사지명을 따서 붙인 땅이름이다. 행정구역상 법정리는 5개리이지만 자연마을로 치자면 지로, 동성, 남성, 성남, 박동과 동삼인, 서삼인, 남삼인, 신지 마을을 포함하여 훨씬 많다. 주민은 5개 리 450세대가 살고 있으며 인구는 약 940여명(2017년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라병마절도사의 영(營)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마을이다. 주위의 수인산, 성자산, 옥녀봉, 별락산, 화방산 등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형태의 천연요새로,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전라병마절도사영이 이곳에 들어섰다. 그리고 성을 쌓았다. 1417년(태종 17)의 일이다. 옮겨 오기 이전의 전라병영은 광주(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소재 고내상성지[古內廂城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병영 일원은 강진의 북부를 관장하던 도강군(道康郡)의 치소가 있던 지역이다. 1417년에 도강은 탐진과 합해 두 고을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강진현이라 하면서 현재의 읍자리로 옮겨 가고, 도강군 지역은 옛 읍터라는 뜻의 고군면(古郡面)이라 한다. 그 도강군 치소 자리에 전라병영이 자리잡게 된다. ‘고군(古郡)’과 ‘병영(兵營)’의 지명유래가 이에서 연유한다. 조선후기 호구수와 동리를 기록한 『호구총수』(1789년)에는 전라도 강진 노상면과 노하면에 속하고 있다. 강진 노상면(路上面) ; 당상리(堂上里), 송정리(松亭里), 역전(驛田), 북문리(北門里), 노상리(路上里), 중로리(中路里), 상림리(上林里)(『호구총수』 )
    강진 노하면(路下面) ; 서문리(西門里), 노하리(路下里), 내상리(內廂里), 은교리(隱橋里), 삼인리(三仁里), 성리(古城里), 백양리(白羊里), 남산리(南山里)(『호구총수』 )
    1895년 윤5월에 전국 8도를 23부(府)로 개편할 때 나주부 강진군에 속하게 되며, 1896년 8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남도 강진군에 속한다. 1912년에는 고군면의 23개리가 기록이 나타난다.
    古郡面 ; 樂山里, 上林里, 學士里, 翰林里, 中加里, 上古里, 上堂里, 下古里, 仲乃里, 道弄里, 白羊里, 新池里, 三仁里, 南東里, 內床里, 南西里,, 孝節里, 博洞, 路上里, 枳亭里, 東烈里, 堂山里, 龍頭里, 朔屯里(조선총독부,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
    1914년 강진군 고군면 지로리(지정, 노상), 성동리(당산, 내상 효절), 성남리(남도, 남서), 박동리(박동, 동열), 삼인리(삼인, 신지)로 합해진다. 다시 고군면은 1931년에 병영면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정호, 『지방연혁연구』 -전남을 중심으로-, 1988. ; 강진군·강진문화원, 『강진군마을사』 : 병영면편, 1991. ; 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제1권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지로리(枳路里)의 경우, 조선시대로 치자면 전라도 강진군 고군면 지정리(枳亭里)와 로상리(路上里)이다. 이 두 개 마을이 1914년에 합해지면서 지로리가 된 것이다. 이 지명 가운데 현재 마을 이름 지로리를 구성하는 한 마을인 지정리(枳亭里)가 눈에 띤다. ‘지(枳)’는 탱자나무를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동네, 그 공간을 가르는 생울로서의 탱자나무, 이런 연결이 지명에 까지 이른듯 싶다. 또한 로상리(路上里)는 길의 위쪽 동네라는 위치를 나타낸다 하겠다.
    병영마을은 정북에서 약 50도 정도 틀어진 북동쪽으로 긴 타원형의 모양이며 긴 방향으로 1.2km 정도이고 짧은 방향으로는 400m 정도로 마을의 중앙을 한골목이라 부르는 길이 관통하고 있다. 마을길의 구성체계는 835번 지방도와 한골목, 멀리 수인산에서부터 흐르는 병영천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이 세 길을 연결하는 간선과 지선들의 격자형 형태로 구성된다. 그러나 마을의 규모가 크고 여러 마을이 인접하고 있어 전체를 순환하거나 상호 연결하는 동선은 찾아보기 힘들고 작은 블록이나 하천으로 연결된 막다른 길 등으로 단절된 동선체계도 가끔 보이기도 한다.
    전라병영이 들어서기 전에는 강진 북부를 관장하던 도강군(道康郡) 치소가 있던 지역이다. 백제 때부터 고현(古縣)이 있던 곳이다. 백제 때는 도무군(道武郡),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양무군(陽武郡), 고려 때 도강이라 한다. 그만큼 산수가 좋고 물산이 넉넉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백제, 즉 고대 이래 독립된 고을이 있을 만큼의 역사지리적 배경, 그것이 전라병영의 설치까지 이르렀고, 현재의 ‘병영’ 지명의 유래이다. 그 역사지리적인 배경 가운데 하나로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을 들 수 있다. 지금도 병영마을의 돌담장과 함께 있다. 
    고인돌과 어울어진 담장, 선사시대 유적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경작지, 살림집과 함께 생활공간화 되었다. 고인돌 옆의 일부 담장은 시대 편의를 따라 시멘블럭담이 되었다. 이러한 장소성 때문에 다른 마을의 담장과 상이한 특징들이 발견된다. 조선시대 전라도의 육군본부이자 훈련소였던 전라병영성의 교통로로서 이용되었으며 병마절도사나 군관들이 말을 타고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이용하였던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담장의 높이가 다른 시골마을 담장에 비해 높은 편이라는 점이다. 군관들이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갈 때 내부 생활공간의 차폐를 위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높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한골목’이라 부르는 돌담장 길이 있다. 병영마을 돌담길의 중심지라 할만한 곳이다. 한골목은 병영면 성남리에서 지로리까지 약 1.3km의 골목으로 병영면 소재지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9년 농촌개발사업 때에 길너비를 넓혀 포장하면서 한쪽이 블록담장으로 일부가 변하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이 지역 특유의 빗살무늬 담장이 곳곳에 남아있다. 예전에는 한골목에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이 골목에서 윗편, 아랫편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담장은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이다.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 독특하다. 조선시대 표류인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로부터 습득한 것으로 전해오는 담쌓기 라고 전하며, 이곳에서는 이 형식을 ‘하멜식 담쌓기’라 부른다. 담장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은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하부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 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으며 담 위에는 기와로 지붕처리를 하였다. 마을 안길이 직선형으로 되어 있어 담장이 한층 정연해 보인다. (강진군, 『강진 병영마을 옛 담장 종합정비기본계획』, 2007. ; 문화재청, 『2006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 2010. )


    원형으로 보존되어 오는 담장, 빗살형태 쌓기나 잘 나타나 있다. 기존 담장 위에 재축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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